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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웹툰] 친일경찰 소탕하라! 최능진 수사국장
등록일 2019-06-17 00:00:00
부서명 본청 대변인
조회수 670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던 1951년 1월 20일, 나라와 민족만을 생각한 애국지사이자 친일청산을 목놓아 외친 경찰관 최능진이 차가운 총성에 비운의 최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는 어째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일까. 親日警察陳掃蕩하라 '친일경찰진 소탕하라' -최능진 수사국장- 제작: 경찰청 작화 : 이인재 일석 최능진 (1899-1951). 평남 강서 출신인 그는 광복 후 친일 세력을 몰아내고 건국의 기틀을 닦고자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의 치안부장으로 활동하였다. 38도선 부우우웅 그러나 당시 38선 이북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과 북조선노동당의 탄압으로 치안부가 곧 해산되었고 우익 청년들에 대한 검거 선풍이 불어 이를 피해 월남하였다. 이것 좀 보죠. 남쪽에는 아직도 매국노들이 남아있나 봅네다. 기가 막힌 노릇이군.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순 없어. 그는 월남 도중 일경 출신 경찰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분개하여 동지들과 함께 곧바로 친일 세력을 몰아내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고자 경찰에 투신하였다. 올바른 정신으로 민족자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역군을 길러내기 위해 그는 제일 먼저 경찰관 강습소 (현 경찰인재개발원) 책임자가 되어 치안유지를 담당할 새로운 경찰을 양성하는데 온 힘을 쏟았다. 搜査課長 崔能珍 1945년 10월, 경무국 (훗날 경무부)이 창설됨에 따라 그는 수사과장 (훗날 수사국장)으로 자리를 옮겨 특무대를 창설, 비리수사 등을 전담하며 혼란했던 사회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시 대량으로 유통되던 마약 밀매 사건의 주범을 검거하며 광복 이후 최대 규모의 마약 사건을 해결하는 등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이 사람아, 우리는 정의의 편에서 일하는데 일에 도움이 된다고 어깨들을 이용할 수야 있나, 그만 두게! 공무를 수행하는 그의 성품은 올곧고 강직하였다. 마약 사건의 주범을 재판에 넘기지 말고 훈방한 뒤 공작원으로 쓰자던 부하를 호통칠 정도로 불의와 절대로 타협하지 않았다. 치안 유지 뿐만 아니라 경찰 내 친일 세력 축출에도 큰 관심을 가졌는데, 직접 친일 분자들의 신원 조사를 시작하여 친일자 명단을 개인별 신상카드로 제작하는가 하면 미국의 민주경찰 치안에 대하야 '경찰이 민권을 존중하면서도 애국자로 된 기관이어야 한다'며 애국자들로 구성된 민주경찰이 되어야 함을 피력, 친일 부패 경찰을 겨냥한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가 이처럼 친일 청산을 중요시한 이유는 자신이 철저한 독립운동가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찍이 친형들인 최능현, 최능찬, 최능익의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최능현(1882-1933, 건국훈장 애족장), 최능찬(1901-1932, 건국훈장 독립장), 최능익 (1889-미상, 건국훈장 애국장) 미국 유학 시절, 독립을 위해서는 민족의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안창호 선생의 주장에 깊이 공감하고 흥사단에 입단하여 계몽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동광 국내에 돌아와서는 흥사단의 국내 단체인 수양동우회 에서 기관지 『동광』에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많은 글을 기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대륙 침략을 앞둔 일제가 수양동우회 중심 인물들을 검거하면서 최능진은 안창호, 조병옥 등과 함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간 옥고를 치렀다. ※일명 수양동우회 사건(1937). 1941년 11월 17일, 증거불충분으로 최종 무죄 이 사람아, 젊은 사람이 나라가 없는데 돈을 벌려고 집착하지 말고 나라를 위해 생각해보게. 국내 활동이 어려워져 건너간 중국에서도 한인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강조하였을 정도로 그의 독립 정신은 투철했으며 이는 훗날 친일청산에 대한 강한 의지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대구사건*을 조사하던 최능진은 친일 경찰의 악질적인 행위를 여러 원인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사건 대책 마련을 위해 개최된 한미 공동회담에 참석하였는데 *극심한 식량난 속 미 군정의 강압적인 식량 공출 정책 시행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세력이 경찰과 행정당국에 맞서 발생한 사건 (2010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좌익 세력이 선동했고 일반 시민이 가담한 폭동 사건' '여러 원인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친일경찰과 부패경찰' 회담에서 경무부장 조병옥은 사건을 좌익 세력의 폭동으로 규정한 반면 최능진은 사건 원인에는 친일부패경찰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고 강조하였다. 회담 결과 미 군정은 표면상 친일 경찰 문제에 관심을 갖겠다고 하였으나 사실상 문제가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1946년 12월 3일, 경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이유로 최능진을 파면한다. 이에 반발한 최능진은 요직을 차지한 일제의 주구들은 민족이 용서치 않을 것이라는 성명을 시작으로 경찰 수뇌부와 약 한달여 간 성명전을 벌이며 친일 세력 청산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최능진은 친일 부역자 축출이라는 목표는 실현하지 못했으나 그의 소신있는 외침은 당시 국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경찰복을 벗은 최능진은 1948년 2월, UN 한국위원회에서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자 국토의 분단과 민족의 분열을 막기 위해 제헌의회 의원 출마를 결심한다. 그는 이승만 박사가 단독 입후보한 동대문갑구에 출마하였다. 친일 세력 청산을 줄기차게 외쳤던 그는 국민들의 지지가 높아 그 인기가 이승만 박사를 위협할 정도였다. 「남북통일을 하랴거든!! 동족상잔을 피하랴거든!! 최능진 선생에게 투표하자」 -5·10 총선거 최능진 후보 선거 벽보 내용 中- ! 타악 접수 그러나 입후보 서류가 날치기 당하기 일쑤였고 선거 하루 전 서류 미비라는 석연찮은 이유로 후보 등록이 취소되었다. 피고는 어떤 노선을 지지하는가? 김구 주석의 노선을 지지하나 외세의 간섭 없이 자율적 독립을 할 수 있는 것을 원한다. 이후 서재필 대통령 추대운동 등의 활동으로 통일 정부 수립을 꾀했던 그는 1948년 10월, 쿠데타 기도 및 여순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지목되며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의 일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그는 전쟁 와중에 석방된 후에도 민족통일, 정전평화를 주장하며 인민군 점령 하 서울에서 '즉각 정전, 평화호소대회'를 추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문에 서울이 수복된 후 그는 정전 활동을 한 친북활동가로 몰려 체포되었고 이적죄 (국방경비법 제 32조)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한 달도 안 되어 총살되었다. '본인은 좌익도 아니요 대한민국의 반역자도 아닌 것만은 잘 인정해주기 바랍니다.' -처형 직전 군법회의에 보낸 전문 中- '정치사상은 민족을 초월하여 있을 수 없다.' '아비의 금일의 운명은 정치적 모략에서 됨인데 너희들은 조도 누구에게 반감을 갖지도 말고 또한 아비의 원수를 갚을 생각도 말고 오직 너희 오남매는 아비가 있을 때보다 더 서로 사랑하며 외로운 어미를 잘 봉양하여라.' -처형 직전 자식들에게 보낸 유서 中- 친일세력을 숙청하여 굳건한 자주적 독립국가를 건설하고자 했던 진정한 애국지사 최능진 비록 친일청산, 평화통일 활동은 당대에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이념 대립을 뛰어 넘는 민족애를 강조한 그의 애국애민정신은 계승되어야 할 참된 경찰정신이다. 2016년 6월 28일,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1951년 2월 사형당한 최능진에 대한 재심에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범죄의 증명이 없다'며 최종 무죄 확정되어 명예가 회복된 바 있다. ※ 안타깝게도 최능진은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경찰청은 유족 측과 함께 최능진이 서훈을 받을 수 있도록 연구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최능진 (1899~1951) - 1899. 7. 29. 평남 강서 출생 - 1917. 美 듀크대, 스프링필드대 체육 전공 - 1918. 12. 27. 흥사단 입단 - 1919. 5. 청년혈성단 조직 - 1929. 평양 숭실전문학교 체육 교수 - 1937. 3.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 - 1937. 11. 치안유지법 위반 서대문형무소 수감 - 1945. 8.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 - 1945. 10. 21. 경무국 수사과장(훗날 경무부 수사국장) - 1946. 12. 3. 파면 - 1948. 5. 제헌의회 서울 동대문 갑구 출마 - 1948. 10.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기소, 징역 5년 선고 및 서대문형무소 복역 - 1950. 6. 전쟁 중 석방 - 1950. 7. 정전평화호소대회 추진 - 1950. 12. 합동수사본부에 체포 (국방경비법 제32조 이적죄) - 1951. 1. 20. 사형 (총살형) 선고 - 1951. 2. 11. 총살형 집행 - 2015. 2. 유족, 이적죄 재심 청구 - 2016. 6. 28. 대법원, 최종 무죄 확정 참고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1권, 1973 진실화해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인권침해사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pp.50-51. 경성 :국립중앙도서관, 「미국의 민주경찰치안에 대하야」,「아미리가 화보 창간호」, 1946, pp.36-37. 「KBS 인물현대사 20회」 '민족이 최선이다' - 최능진 KBS 미디어 2003.11.21. 방영 다큐멘터리 극장 31편 (인물발굴 1편) KBS 영상사업단 제작 -1994.1.23. 자유신문, “경찰진에 파문”, 1946.12.6. 서울신문,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 파면통고에 대한 회답 공개장 발표”, 1946.12.7. 자유신문, “파면당한 최국장 등청 경무부에 때 아닌 소란”, 1946.12.7. 자유신문, “최능진씨의 문제의 회답문”, 1946.12.7. 서울신문, “전 수사국장 최능진, 성명서 발표”, 1946.12.14. 자유신문, “친일경찰진 소탕하라”, 1946.12.14. 영남일보, “일제주구경찰존치는 순국열사통분을 조장, 최능진씨재차성명”, 1946.12.16. 자유신문, “최능진씨 입후보 말소”, 1948.5.9. 조선일보, “수도경찰청, 전 수사국장 최능진을 내란음모 혐의로 체포”, 1948.10.5. 자유신문, “정부 전복음모로 최능진 일파 기소”, 1948.11.9. 자유신문, “최능진 3년 징역, 서세충씨는 무죄 판결”, 1949.6.1. 자유신문, “최능진 5년 언도”, 1949.11.3. 민주신보, “고등군법회의, 최능진에게 부역혐의로 총살형 언도”, 1951.1.26. 경향신문, “비화한세대”, 1977.3.24.-1977.6.9. 한겨레신문, “친일파 숙청 주장한 미군정 경찰간부”, 1991.1.25. 연합뉴스, “흥사단 출신 독립운동가 최능진씨 65년만에 무죄 확정”, 2016.6.28.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