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 바로가기

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웹툰] 독립투사 김영진 경사 이야기
등록일 2019-06-14 00:00:00
부서명 본청 시스템운영팀
조회수 655
「나는 대한민국 광복군이다」
- 독립투사 김영진 경사 이야기 -
제작 : 경찰청 작화 : 이인재

광복군에 들어올 수 있겠느냐? 조국을 위한 독립군이다. 한국 광복군 제3지대 화중 특파공작대원 윤창호(1921-1967,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와 17세 소년의 운명적인 만남... 한 소년의 조국 광복을 위한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대한민국 광복군이다 독립투사 김영진 경사 이야기  제작 : 경찰청 작화 : 이인재 영진아! 아이고 영진아! 인석아 기다려라! 중국땅이 어딘 줄 알고 가는게냐! ! 죄송합니다. 아버지, 저는 꼭 가야합니다. 광복군이 있다는 그 곳에 반드시 갈 겁니다. 안녕히 계세요. 아버지, 꼭 돌아오겠습니다. 휙 뿌우우우 1943년, 일제가 민주사변(1931), 중일전쟁(1937), 태평양전쟁(1941)을 일으키며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 수탈에 광분하던 시대에, 17세 소년 김영진 선생은 독립에 대한 뚜렷한 신념을 마음에 품고 독립군이 되고자 혈혈단신 중국으로 떠났다. 경성~봉천~천진을 거쳐 그가 도착한 곳은 중국 강소성 서주.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 들어가 독립군에 들어갈 날만을 기다리며 지내던 어느 날, 네, 하겠습니다! 조국 광복을 위해서 하겠습니다! 그는 광복군 제3지대 화중 특파공작대원 윤창호를 만난 것이다. '광복군은 독립군'이라는 말에 합류를 결심한 김영진 선생은 1944년 9월, 마침내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최연소로 입대하게 된다. 3개월간 훈련을 받은 그는 한성수(1920~1945, 1997년 건국훈장 독립장)조장과 함께 초모 공작 임무를 부여받고 일본군 최고 사령부가 있는 상해로 특파된다. ※초모()공작 : 군대에 입대할 사람이나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되거나 중국에 체류 중인 한국인이 주 대상이었다.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들으면 한국 사람인거야. 신호를 보내보자고. 그럼 저 왜놈과 떨어진 틈을 타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그들은 일본군에게 징집된 한국인 병사의 주말 외출 시, 감시자인 일본인 병사의 눈을 피해 한인 병사에 접근하여 광복군으로 포섭하는 임무를 주로 수행하였다. 발각, 배신 등의 가능성이 커 대단히 위험한 임무였다. 조국을 위한 일입니다. 협조해 주십시오. 이외에도 군자금 모금 활동 및 기밀 연락 유지 업무 등을 담당하였는데, 한성수 조장과 함께 상해에 체류하는 한국인 거부에게 군자금을 모금하는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일이 잘못되었다, 빨리 여길 빠져나가자. 군자금은 받으신 겁니까? 하지만 한국인 거부로부터의 군자금 모금은 실패하였고 그로부터 얼마 뒤인 1945년 3월 13일, 누군가의 밀고로 일본 헌병대에 의해 한성수 조장을 포함, 특파공작원 전원이 체포되고 만다. 김영진 선생은 체포되는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하여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 광복군 신분장을 재빨리 버렸고 물고문, 전기고문 등 온갖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을 발설하지 않았다. 너희 일본은 이번 전쟁에서 기필코 패전하고야 만다. 그때 가서는 대한민국을 독립시켜주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며, 한국 독립군들이 독립운동을 하다 무수히 희생 당한 것과 같은 고초를 침략자인 너희들도 당하고 말 것이다!!! (한성수 의사의 실제 재판시 발언) 1945년 3월, 결국 함께 체포된 한성수 대장은 일본 군법회의에 회부된 후 참수되었고, 김영진 선생은 미성년자라는 이유로 징역 단기 3년, 장기 5년형을 언도받고 남경형무소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서대문형무소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출소한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해 동고동락을 했던 동지들이 참형을 당하는 큰 아픔을 겪었음에도 나라의 재건을 위해 청춘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먼저 그는 각종 정파가 우후죽순 생겨나 격렬히 대립하는 혼란 속에서, 광복군 출신 경호원을 찾고있던 김구 선생을 찾아가 경교장에서 그를 경호하였으며, 1949년 9월에는 철도경찰로 경찰에 투신하였다. 철도경찰은 철도와 철로상에서 발생하는 범법 단속과 예방, 그리고 관련 시설물의 보호 등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던 경찰 조직이었는데, 김영진 선생은 순찰 및 사찰 업무를 수행하며 철도를 이용하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졌다. 6·25전쟁이 끝나갈 무렵에 부산시경으로 옮겨 정보과 외근과 부산 중부서 정보과 등 정보형사로 경찰생활의 대부분을 근무하였으며, 특히, 1957년 10월에는 하숙집 불심검문을 통해 남파 간첩을 검거하는 등 26년 간 조국 치안에 헌신하였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되찾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광복군으로서, 경찰관으로서, 나라에 한평생 다 바쳤던 김영진 선생 독립투사 김영진 선생의 고귀한 헌신은 대한민국 경찰의 소중한 귀감이 되고 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3월 20일. 민갑룡 경찰청장은 15만 경찰 후배들을 대신하여 국가와 국민을 위해 한평생 헌신하신 김영진 선배님을 찾아뵙고 감사 인사와 함께 국민들에게 당당한 민주경찰이 되겠다는 굳은 다짐을 전해드렸다. 독립투사 김영진 선배님! 조국을 윟나 선배님의 고귀한 헌신은 대한민국 경찰의 영원한 귀감입니다! 2019. 3. 30. 경찰청장 민갑룡 외 후배 경찰관 일동 '경찰관들 주야 노력하고 계신데... 내가 찾아뵙고 인사를 해야 그게 당연한데, 이런 반대 입장이 돼서 너무나 마음이 아픕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당일 김영진 선생 말씀 중- 경사 김영진 1927~생존 - 1927. 11. 15. 경북 봉화 출생 - 1943. 6. 중국 서주 광복군 초모 공작 및 적정 탐지 활동 - 1944. 9. 광복군 제3지대 입대, 상해지구 특파공작원 활약 - 1949. ~ 1953. 치안국 철도경찰대(본대) 근무 - 1953.10. 일반 경찰로 이직(부산) - 1968. 4. 경사 심사승진(부산중부서) - 1976. 2. 퇴직(총 25년 11개월 재직) - 現 광복회 대의원 김영진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 11옥사 17호실 앞에서 손자와 함께 -참고- 경찰인사기록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D/B 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국가기록원「조선국립경찰의 조직에 관한 건」 내무부 치안국,「한국경찰사」2권, 1973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제6권,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김승학,「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70 경찰청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