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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최능진 수사국장(1899~1951)
경찰이력 경무부 수사국장
인물소개 친일경찰 청산과 평화통일을 외친 민족주의자
서훈 독립유공자 심사 중
최능진 수사국장(1899~1951)

○ 생애·경찰이력(총 재직기간 1년 2월)


  1899년 평남 강서군 반석면에서 출생하여 1951년에 사망하였다.

1915년 평양 숭실학교 졸업 후 1917년 미국으로 건너가 1926년 듀크대 3년 재학 중 스프링필드 대학으로 옮겨 체육학과를 졸업하였다(1929년).


  1945년 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을 지냈고 이후 월남하여 ‘조선경찰관강습소’의 한국인 책임자로 경찰에 입직하였다.

1945년 10월 경무국 수사과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1946년 1월 경무국이 부로 승격되며 수사국장이 된다.

1946년 10월 친일경찰 청산을 주창하며 조병옥 경무부장과 대립하였고 결국 그해 12월 파면되었다.

이후 1948년 ‘5월 총선’에 동대문 갑구에 출마하여 이승만과 대결하려 했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후보등록이 취소되며 무산되었다.


  1948년 10월 1일 혁명의용군 사건(정부 전복 쿠데타 혐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6.25전쟁 중 서대문형무소의 문이 열리면서 다른 수형인들과 함께 출옥하였다.

이후 “UN을 통한 평화통일” 등 정전·평화통일 운동을 벌이다 이적죄로 몰려 전쟁 중인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야산에서 총살당하였다.

하지만 2016년 6월 대법원은 형사재심을 통해 최능진에 대해 무죄를 판결하였으며 2017년의 국가배상 소송에서도 유족이 승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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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 경력


 1917년 8월 미국에서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입하였으며, 1919년 5월 재미 청년들과 ‘청년혈성단’을 조직하여 미주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열기를 고조시키는데 기여하였다.

1929년 귀국하여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흥사단 계열인 수양동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청년들의 실력배양에 힘을 쏟았다.


  1934년 6월 22일 외국위체관리법으로 징역 8월을 선고 받았으나 1934년 9월 20일 형집행 종료로 풀려났다.

이어 1937년과 1938년 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두 차례 투옥되고 징역 2년을 언도받았으나 결국 1941년 11월 17일 최종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출처: 최능진 기념사업회 수집자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