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김구(金九) 1876~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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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력 | 초대 경무국장 |
인물소개 | 초대 경무국장, 임시정부 경찰의 기틀을 다지다 |
서훈 | 대한민국장 |
![]() 백범 김구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 독립운동가 이자, 해방된 조국을 위해 힘쓰다 비명에 돌아가신 우리나라 대표적 독립운동가 이다. 그의 생애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경찰로서의 주요 활약은 다음과 같다.
이에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상해 동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안녕을 책임지고 일제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수호하였다. 또한 정·사복 경호원 20명을 두어 임시정부 경찰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927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고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또한 1928년에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다.
의경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교민 보호에 힘쓰는 한편, 1932년 1월 11일에는 의경대장으로 취임하여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동경 의거와, 3월 유진만·이덕주의사의 조선총독 암살 기도, 5월 유상근·최흥식의사의 만주 대련 남만주 철도총재 폭살을 계획하였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거를 계획, 실행에 성공하면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대대적 탄압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임정요인들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면서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 이어진 임시정부 이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oss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1948. 2월 UN에서 남한 내 총선거가 결정되자 같은 해 4월 남북연석회를 하는 등 남북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