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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김구(金九) 1876~1949
경찰이력 초대 경무국장
인물소개 초대 경무국장, 임시정부 경찰의 기틀을 다지다
서훈 대한민국장
김구(金九) 1876~1949

  백범 김구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 독립운동가 이자, 해방된 조국을 위해 힘쓰다 비명에 돌아가신 우리나라 대표적 독립운동가 이다.

그의 생애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경찰로서의 주요 활약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1 만세 시위 사건에 가담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를 만나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에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상해 동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안녕을 책임지고 일제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수호하였다.

또한 정·사복 경호원 20명을 두어 임시정부 경찰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그는 1922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여 재정적으로 힘든 임시정부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27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고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또한 1928년에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다.


  1930년 국무령(國務領)에 재선되었으며, 1931년에는 지방경찰조직인 상해대한교민단 의경대장에 취임하여

의경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교민 보호에 힘쓰는 한편, 1932년 1월 11일에는 의경대장으로 취임하여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같은 시기 그는 독립운동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으며, 의경대장이자 한인애국단장으로서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동경 의거와, 3월 유진만·이덕주의사의 조선총독 암살 기도, 5월 유상근·최흥식의사의 만주 대련 남만주 철도총재 폭살을 계획하였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거를 계획, 실행에 성공하면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대대적 탄압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임정요인들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면서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 이어진 임시정부 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에는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총통을 만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설립, 광복군 양성소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다.
1938년에는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9년말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 주석(主席)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으며, 5월 각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좌우통합을 꾀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으로 임명되었으며,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oss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해방 후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三相會議)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대한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8. 2월 UN에서 남한 내 총선거가 결정되자 같은 해 4월 남북연석회를 하는 등

남북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