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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최중호(崔重鎬) 1891~1934
경찰이력 경무국원
인물소개 인재양성에 주력, 독립투사를 양성하다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최중호(崔重鎬) 1891~1934

  황해도 신천(信川) 출신,

1906년 안악(安岳)에서 김 구(金九)와 함께 공부하다가 평양(平壤)에 있는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08년 김구(金九)가 일본 사내(寺內)총독 암살 음모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 끝에 아끼는 후배로 그의 이름을 대게 되자

1911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미결수로 9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

유배형(流配刑)을 받고 진도(珍島)에 유배되었다가 1914년에 귀향하였다.


  귀향한 후에도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하였으며, 1916년 만주 안동, 하얼빈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뒤 상해로 망명하여 이름을 황훈(黃勳)이라고 개명하였다.


  1920년 2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상해 동포의 안녕 보호와 임시정부 수호를 위해 힘썼으며,

1921년 항일선전을 위한 「사민보(四民報)」를 발간하게 되자 그는 이 신문의 편집 발행을 담당하였다. 


 1924년 상해교민단(上海僑民團) 의원에 선출되었다가 곧 사직하고, 교민단에서 경영하는 인성학교(仁成學校)교사로 들어가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또한 임시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에 참가하여 군자금 모집을 위해서 적극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1년 11월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합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上海韓人反帝同盟)"으로 발전 해체될 때까지 독립운동자동맹 조직부장으로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또는 옥고를 치른 여독으로 1934년 3월 상해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