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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이성구,수봉(李成九,秀峰) 1896~1933
경찰이력 의경대
인물소개 의열투쟁의 선봉장, 옥중에서 서거하다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이성구,수봉(李成九,秀峰) 1896~1933

  평안북도 선천(宣川) 출신,

1919년 3·1독립운동 때 고향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친일파인 선천군 태산면장 김병탁(金炳鐸)을 총살한 의거에 연루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병보석으로 4년 만에 가출옥하였다.


  그는 가출옥과 동시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1926년 1월에는 박창세(朴昌世) 문일민(文一民) 강창제(姜昌濟) 이운환(李雲煥) 등과 같이

무장항쟁을 위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 강력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병인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경호를 위한 외곽단체로 크게 기여하였으며, 일제의 앞잡이 밀정공산도배, 변절자를 숙청 처단하였다.

또한 상해 일본영사관에 폭탄의거를 세 차례 감행하여 영사관 일부를 파괴, 일경 두명에게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1929년 1월에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특별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930년 5월에는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 의경대원(義警隊員)으로도 활약하였다.
 또한 같은 해 상해 한국독립당에 가입 후 기관지인 ‘상해한문’의 기자로 활동하던 중

1932년 10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에서 순국하자 애도의 글을 실어 배포하는 등 지속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윤봉길의사의 홍구공원 의거 후 독립운동가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와 수색이 진행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상해 한인친우회 위원장 유인발을 저격하는 등 일제의 침략통치에 적극 항거했다.


  그러던 중 프랑스조계 하비로(霞飛路)의 백제약방(百濟藥房)에서 옥성빈(玉成彬)과 만나기로 약속한 그는 약속장소에 도착하였으나, 잠복하고 있던 일영사관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신의주로 압송된 그는 1934년 3월 1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혹독한 고문의 여독으로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