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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뿌리

  • 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김기형(金基瀅) 1887~1943
경찰이력 연통제 경무사
인물소개 국내와 상해를 연계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김기형(金基瀅) 1887~1943

  황해도 안악(安岳) 출신,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하여 안악군내의 만세시위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에 그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통제(聯通制) 황해도 경무사(警務司)로 임명되어 군자금모집 등의 활약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의 산하단체로서 한용단(韓勇團)을 조직하여 독립공채를 매각하는 등 군자금 모금활동에 주력하다가

1921년 1월 29일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동년 8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에도 임시정부의 밀령으로 황해도 독판(督辦) 및 각 군의 요원들에게 연락사항을 전달·지시하며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다가 상해로 건너갔다.  
 1922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듬해 10월에는 상해에서 노병(勞兵) 양성과 전쟁 비용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 발기총회에서 김구·여운형·박은식 등 16명과 노병회를 조직하였다.

  1924년에는 상해교민단 총무부장을 역임하였으며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이사를 맡는 한편 한국노병회 회계검사원이 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審判委員)에 선임되어 이승만을 면직시키는 심판서를 1925년 3월 11일에 발표하였다.

이듬해 11월 한국노병회 정기총회에서 회계검사원으로 재임되어 노병회의 재정을 감사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928년 3월에는 김구 등과 같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중앙집행위원·재무부장·문화부장·감사 등을 지내다가 2년 후에는 한국노병회의 이사로 취임하였다.

1931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 상임위원 등을 지냈고, 남경(南京)에서는 5당 통일운동에 참여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을 하는 등

민족진영의 단결에 힘써 오다가 1937년에 동당의 감찰위원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창립 등 항일 광복운동에 힘쓰다가 1943년 중경(重慶)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