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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경찰

두근두근 인권으로 in(인권소식지 6월호)
등록일 2020-07-27 15:14:41
부서명 본청 감사 인권보호 인권보호
조회수 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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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인권으로 in 6 @jason-briscoe / unsplash 경찰청 인권센터人 사람X인권경찰 권력,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박원식 인권보호계장 「경찰관 인권행동강령」 제정에 부쳐... 박원식 인권보호계장 얼마 전 택시를 탔다. 불경기라 손님이 없어서인지 내심 반가운 눈치를 보이던 택시기사는 이내 코로나 19가 언제까지 갈 것인가, 경제가 어렵고, 정치가 어떻다는 등의 이야기를 늘어놨다. 적잖이 불편했다. 초면인 누군가의 정치적 신념을 굳이 들어야 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선 생님 제가 생각할 것이 있어서 좀 조용히 가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치는 순간 택시 안의 온 도가 달라졌다. 야박하다 느낀 걸까. 내내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탈출하듯 내려야 했다. 그래도 택시기사를 딱히 탓하고 싶지 않은 건 그가 제시간에 안전하게 나를 태워줬기 때문이 다. 조용히 가고 싶다는 요구도 맞춰주었다. 택시기사로서 기본에 충실한 그의 서비스를 다소 간의 불편함 때문에 평가절하할 수 있을까. 차에서 내려서도 생각은 이어졌다. 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 법을 집행하는 경찰은 어떠할까. 경찰도 기본에만 충실하면 온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경찰관은 아무리 전문지식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고 또 정해진 절차대로 업무를 수행한다고 해도 온당한 평가를 받기 어렵 다. 서비스를 접하는 개개인은 전문지식이나 공정함, 친절과 같은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 이라는 관점에서 경찰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범법자를 체포하고, 교통범칙금을 통고처분하는 경찰관은 아무리 공정하고 친절하게 직무를 수행해도 '나의 자유와 재산를 침해하는 부당한 공권력'으로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제복을 입었기에 부당한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주어진 임무를 수행할 뿐이지만 참 어렵다. 경 찰은 뭐라 정의하기 쉽지 않은 실제 상황 속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면서 매 순간 이기적인 저항에 직면한다. 내가 공정하고 친절하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존중할 것이라고 장 담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경찰관은 심리적으로 고립된다. 경찰관의 감정노동 강도가 타 직군 보다 월등히 높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함께하는 인권경찰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 / 출처 : BBC스포츠 인권은 단순히 지켜야 할 기준이 아니라 실현해야 할 핵심 가치이다. 몇 달 전부터 경찰관 인권행동강령 제정을 준비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다. 안 그래도 '인권' 피로감을 느끼는 일선 현장경찰관들에게 또 하나의 굴레를 씌우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했다. 지금까지 강령이 없어서 경찰이 일을 못했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인권행동강령 같은 게 없어도 경찰은 70년이 넘는 시간을 국민의 곁을 지켜왔지 않나. 강령을 만들면 갑자기 시민들로부터 신뢰받는 경찰이 된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도 인권행동강령을는지 딱 한가지 이유만 대라고 한다면, 경찰관이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원칙으로 정하고 천명하기 위해서라고 답하고 싶다. 법을 집행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역할을 하지만 절차를 준수하고, 남용되지 않 도록 스스로 절제하는 품격있는 경찰, 국민이 바라고 경찰 스스로가 추구하는 가치가 아닐까. 하지만 현실은 경찰관으로서의 나'를 스스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부단히 노력하고 인내한다고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원칙을 정하고 원칙이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일관된 모습으로 나아가는 믿음을 주어야만 신뢰와 지지를 얻을 수 있고 그 신뢰와 지지 위에서만 경찰은 빛날 수 있다. 경찰관 인권행동강령은 그 원칙을 담고 있다. 경찰은 이제 한 방향을 향해 일관되게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얼마 전 한 언론기사에 눈길이 갔다. “그만 체포하시죠? 신입 경관은 그를 3번 말렸다” 라는 제 목의 기사였다. 최근 미국의 '인종차별'로 인한 사망 사건과 관련해 살인 혐의를 받는 백인 경 관이 체포 당시 신입 경관의 거듭된 만류에도 흑인의 목을 무릎으로 누르는 행위를 멈추지 않 았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함께 출동한 4명의 경찰관들은 살인 및 살인 방조혐의로 기소되었고 모두 해고됐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에만 국한된 것일까. 한국 경찰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항변할 수 있다. 하지만 과거 경찰은 국민의 마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준 안타까운 순간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 에서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명시적으로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만류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경찰관 인권행동강령은 이러한 부당한 지시에 대해 거부해야 하는 의무와 이로 인한 부당한 처우를 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함께하는 인권경찰2020. 6. 10, 경찰관 인권행동강령 선포식 법이 정의를 향해 나아갈 때 경찰은 인권을 동반자 삼아 함께 달려가야 한다. 수사권 조정의 완성이 코앞이다. 시민은 새롭게 도입되는 형사사법체계 안에서 경찰의 '책임 수사체제'에 몸을 얹는다. 본인이 원하는 곳까지 신속하고 안전하게 데려다 달라는 시민의 요 구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까. 친절한 태도 같은 건 사실 곁가지에 불과할지 모른다.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고, 사회질서 유지를 위해 불가피하게 제한할 때에도 법이 정한 절차와 원칙을 지키는 경찰, 불법 부당한 명령은 단호히 거부하고 사람을 우선하는 경찰이 바로 국민이 원하는 경찰의 모습 아닐까. 경찰관 인권행동강령이 단순 구호에 그치지 않고 경찰의 판단기준과 실천 지침으로 현장에 정착되고 실체화되어야 하는 이유다. 새삼 실체적 국가이자 경찰관의 한 사람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함께하는 인권경찰산에 한 가지 나무만 나지 아니하고, 들에 한 가지 꽃만 피지 아니한다.여러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산림의 아름다움을 이루고백 가지 꽃이 섞여 피어서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백범 김구 @quillaume-bourdages / unsplash仁 자애X경찰 힘내라 홍반장! 얼마 전 우연히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에서 여성 경찰관이 제복을 입고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진행을 한국어가 아닌 생소한 언어로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 잘 들어보니 베트남어였다. 어찌 된 일일까? 궁금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수소문해봤다. 주인공은 다름 아닌 전남 장성 경찰서 외사계에 근무하는 홍민희 경장이었다. 홍경장은 15년 전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가 학교를 졸업하고 무역회사를 다니다 남편을 만나 아이 셋을 낳고 대한민국 경찰관으로 들어온 특별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가 대한민국의 경찰관이 되고 페북 라이브 방송까지 하게 된 데 에는 많은 사연이 있을 듯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전화로 인 터뷰를 요청했다. 수화기 너머 밝고 쾌활한 목소리로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는 홍경장에게 인사를 건네며 그의 사연을 들어보았다. Q 한국에는 언제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는지. A 2005년 베트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의 권유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 교역이 활발해질테니 한국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조선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Q 그럼 2005년 전에는 한국을 와본 적이 없나. A 그 전에는 인터넷이나 방송을 통해 한국을 접했을 뿐 여행을 온 적도 없다. Q 한국에 많은 도시가 있는데 광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A 베트남에서 아버지가 유학 과정을 준비해 줘서 잘 몰랐다. 고등학교 추천을 받아 원서를 넣었는데 운 좋게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처음에는 서울인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에 내려, 또 비행기를 타라고 해서 내려 보니 광주였다.(웃음^^) Q 한국어를 잘했나. 언어 문화적 차이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A 영어를 조금 했는데 한국은 영어소통이 되니 어려움이 없을 거라 들었다. 하지만 막상 와서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니 다들 도망가더라(웃음^^) 학교에 입학해서 교수님과 처음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갔는데 청국장 집이었다. 그때 음식 냄새에 충격을 받아서 한 달 동안 라면만 먹었던 기억이 난다.(웃음^^) 그때는 한국 음식이 다 그런 냄새가 나는 줄 알았다. Q 학교 졸업하고 직장도 잡고 결혼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A 2009년도에 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을 했다. 한국어에 능통하지 못해 사람을 만나는데 일부 제약이 있었지만 무역회사에 취업을 해서 6년간 직장 생활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만나게 된 신랑과 결혼을 해서 아이 셋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Q 이주 여성으로 한국 경찰을 지원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A 어릴 적 베트남에서의 꿈이 경찰이었다. 집에서는 여성이 경찰을 하는 것에 반대였다.한국으로 유학와서 학교를 다니면서 가끔 경찰서와 출입국관리사무소에서 통역 요청이 와서 통역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경찰을 접하게 되었다. 나도 유학하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다른 베트남 사람들이 문화나 언어의 차이로 억울한 일을 겪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어려움을 겪는 베트남 사람들 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내가 경찰을 하게 된 동기인 것 같다. Q 그래도 국적 문제도 있고, 의욕과 마음만 있다고 도전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닐 것같다. A 무역회사를 다니다 휴직하고 둘째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던 중 뉴스에서 우연히 베트남여성 1호 경찰관 소식을 봤다. 그때부터 경찰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 경찰 시험을 보려면 베트남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베트남에 있는 부모님께 상의 드리니 꿈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적극 지지한다고 해서 응원에 힘입어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둘째 아이를 낳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이를 악물고 40kg을 감량했다. 치열하게 노력한 끝에 결국 2017년 12월 순경 공채시험에 합격했다. Q 정말 쉽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 대단하다. A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경찰시험에 응시할 수 있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되어서가능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베트남 이주 여성들을 보면 나이 차이도 많은 남편과 결혼 해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 언어와 문화적 차이로 인해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매우 운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Q 페북 라이브 방송을 운영하던데. A 유학생 시절 한국에 처음 와서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달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지금도 한국에 와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관내에서 작은 봉사활동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뜻밖에도 주변에 어려 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공간을 뛰어넘어 대한민국에 체류하고 있는 베트남인 들을 대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시작했다. “Korea Police 홍반장과 함께...” 라는 계정으로 37,000명 정도의 팔로우를 두고 있습니다. Q 대단하다. 방송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 있나. A 범죄로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는 방법, 외국인을 위한 치안 정보, 최근에는 코로나19 관련 '불법체류자 통보의무 면제', '자가격리 위반자 처벌’, 방역대책 등 정부의 정책을 알려 주고, 있다. Q 최근에 베트남 유학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고 들었다. A 페이스북 방송을 보고 베트남에서 온 지 얼마 안된 학생이었다. 자가격리하면서 많은 어 려움이 있었는데 법무부의 정책들을 알게 되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베트남 사람으로 한국 경찰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며 손편지를 보내왔다.홍민희 경찰님께, 안녕하십니까? 그동안 잘 지냈습니까? 저는 베트남에서 온 유학생입니다. 이번이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많은 새로운 것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문화적 차이로 인해 한국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베트남 공동체를 돕기 위해 귀하가 만든 소셜 네트워크를 알게 되어 기쁩니다. 저는 당신의 생방송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언니라고 불러도 될까요? 언니는 책임있는 사람입니다. 언니는 항상 모든 사람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매우 열정적입니다. 우리는 정말 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언니의 헌신에 감사드립니다. 더 많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0년 5월 3일 올림 언니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 다른 경찰님들께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thank you 사진 출처 : 페이스북 'Korea Police 홍반장과 함께...' Q 보람 있었겠다. 다른 베트남 이주 여성에게 홍경장이 또 다른 롤모델이 된 것 같다. A 많은 베트남 이주 여성들이 나를 거울삼아 경찰에 도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나도 그들에게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이다. Q 한국과 베트남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나 A 먼 과거 전쟁의 아픔이 있기도 했지만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이라는 나라에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박항서 축구 감독의 베트남 축구 랭킹을 올리고 국위 선양을 한 것도 한몫한 것 같다. Q 한국에서 가정도 꾸리고, 아이도 낳고, 경찰공무원으로 생활하는데... 이제 광주아줌씨(아주머니 사투리) 다 된 것 같다 A 그렇다. 이제 광주는 나에게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Q 경찰관으로서 꿈이 있다면... A 지금도 베트남에 한국과 한국 경찰에 대한 홍보를 많이 하고 있다. 베트남 공안도 한국 경찰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자그마한 힘이라도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Q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A 한국 경찰로 처음 들어왔을 때 무엇보다 고마운 이들이 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색다른 시선으로 보지 않고 무덤덤하게 편하게 대해준 동료들이다. 이렇게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 하는 우리 동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대한민국 경찰인 내 모습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지구촌이라는 말처럼 이제는 세계가 하나의 공동체인 것 같다. 우리나 라에도 다문화 가정이 35만 가정에 육박한다고 한다. 이제 다문화 가정은 우리의 삶 깊숙한 곳까지 하나의 공동체로 자리하고 있다. 홍경장은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로 처음 생활에 어려웠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심리적 의지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정작 어렵고 힘들었던 점은 따로 있었지 않았을까. 이따금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 차별하는 듯한 사소한 말투 하 나가 그들을 이국땅에서의 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홍경장은 자랑스런 대한민국 경찰이다. 그런 홍경장이 국내 체류 외국인들의 범죄예방과 치안활동을 위해 따뜻한 시선과 말솜씨로 무장하고 오늘도 페북 라이브에서 뛰고 있다. 그런 홍경장을 위해 응원의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달려라~ 홍반장, 대한민국 경찰 파이팅!" 글. 박원식 인권보호계장 함께하는 인권경찰印 찍다X인권교육 인권교육, 흔적을 남기다. 김채윤,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전문위원 나에게 인권교육이란 강의가 끝난 후, 종종 왜 이 일을 하게 되었는지 질문을 받곤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도, 그때마다 웃으며 답변을 하지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강의를 시작한 계기는 특별하지 않다. 강의를 시작할 당시 나는 글을 참 못 쓰는 대학원생 이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하며 쌓아 올린 사유의 깊이만큼 글로 풀어 전달하지 못하는 콤플 렉스에 시달렸다. 어느 날 지도교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연구자가 사유를 풀고 나누는 방법에는 꼭 글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의도 있다고, 그 말에 용기를 얻은, 소위 아주 “말만(?) 잘하는 학생이었던 나는 그렇게 강의를 시작했다. 그러니 특별하게 어떤 소명 의식이나 성 취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사유하는 것들을 나누고 함께 고민하는 소 소한 즐거움이 좋았다. 문제는 강의의 폭과 깊이가 즐거움을 벗어나 더 큰 주제, 더 다양한 시각으로 넓어지면서 이다. 연구하고 강의를 하는 것이 천직이라 생각했건만, 인권교육은 기존에 내가 하던 법학 강의와는 그 느낌과 무게감이 매우 달랐다. 정신을 가다듬고 인권교육을 시작하면서 기존 법학중심으로 돌아가던 나의 사고를 더 크게 열고, 세상을 긴 호흡으로 천천히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새로운 시각, 다양한 사고와 함께 수백만 가지의 고민과 번 뇌를 가져왔다. 아차, 인권교육은 정말 무겁구나, 겁이 났을 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었다. 인권교육, 무겁다. 아직도 나에게 인권교육은 무겁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강의마다,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 시지에 대한 고민뿐만 아니라 표정, 말투, 예시, 단어 등 많은 것들에게서 민감하고 예민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교육 참여자들이 어떤 맥락과 서사를 가 졌을지 상상하며 공감 방식을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한다. 인권과 성평등 연구와 강의를 업 으로 삼고 있지만, 아직도 한없이 어렵고 무거운 것이 인권교육인 것 같다. 함께하는 인권경찰@tim-mossholder / unsplash LOVE TO LEARN 인권교육이란. 그 시간을 통해 나의 고뇌, 사유가 더욱 다양해지는 경험의 총체이다. 나는 그 과정에서 강의자인 동시에 교육 참여자로서 함께 호흡하게 된다. 자신의 언어로 쌓아온 사유를 공유할 수 있는 그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중한지를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인권교육에 대한 책임감과 무게감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겁다. 인권교육을 하면서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일까?'와 같은 두려움이 매번 몰려오기도 한다. 마치 나의 삶을 반추하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삶의 궤적을 따라가는 불안한 과정이 반복되기 때문 이다. 가끔 지인들이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면서 왜 강의를 계속하느냐고 묻는다. 그때마다. 또 생각해보지만 역시나 거창한 이유나 소명의식을 찾지는 못했다. 다만 누군가 말한 것처럼 “지금 나의 노력과 고통이 세상을 당장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더 나빠지는 것을 막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라는 작은 믿음을 마음에 품고 나아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인권교육, 삶에 흔적 남기기 우리의 삶 속에 인권교육이 남기는 의미와 크기는 매일 달라진다. 지금 나에게 인권교육은, 교육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의 삶 속에 인권이라는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라 정의하고 싶다. 바쁘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인권교육을 통하여 배우고, 성 장하고, 또다시 누군가를 성장시킨다. 비록 서로 다른 관점을 가졌더라도 결국 그 여정의 마지 막에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은 닮아있을 것이라는 작은 희망 속에서, 함께하는 이들에게 인권지향적 삶의 가치가 묻어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인권교육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아직도 나에게 인권교육은 무겁다. 슬쩍 도망가볼까 생각하다가도 강의 전 마음을 가다듬어본다. 오늘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누군가의 삶에 흔적으로 남기를, 오늘 내가 만 나는 이들이 나에게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이며, 나는 그들에게 어떤 흔적이 될 것인지 기대 하며 말이다. 함께하는 인권경찰문화로 보는 사람이야기 : “필름 안 인권” 부산행 연상호, 2016 영화 <부산행>이 수작이라는 데 동의한다. 좀비 영화의 장르적 특성을 잘 뽑아냈다. 드라마 틱한 전개와 빠른 템포가 흥미진진하다. 재난영화 특유의 다양한 캐릭터나 극적 설정들도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았다. 영화 곡성>의 박춘배 같은 좀비가 수백 명 등장하지만, 곡성 에서처럼 느닷없게 느껴지거나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괴력을 기반으로 한 마동석 특유의 액션이 주는 말초적 쾌감도 짜릿했다. 관객들은 무엇보다 이 영화의 사회 비판적 시각에 공 감할 것이다. 기차라는 공간이 주는 폐쇄적이고 계층적인 공간적 특성과 목적지를 향해 질주 하는 구성적 유사성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절반 이상을 담아낸다. 영화 〈설 국열차>가 그랬던 것처럼. 그러나 <부산행>은 어딘가 모르게 비판하고자 하는 대상을 명료 하게 짚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문제의식도 다소 산만해 보였다. 먼저 배경을 보자. 같은 열차 같지만 <설국열차>와 <부산행>의 KTX는 다르다. 설국열차가 멈추지 않고 일정한 궤도를 도는 순환선인 반면, 부산행 KTX는 안전한 장소로의 빠른 이동을 목적으로 한 방향으로 운행 중이다. 설국열차는 그 자체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내재 하지만 부산행의 KTX는 안전지대(부산)에 도착하기 전까지 방심할 수 없는 지옥 그 자체다. 설국열차의 꼬리 칸 승객들은 체제전복을 위해 다른 칸으로 이동하려 하지만 부산행의 KTX 승객들은 그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설국열차의 지배자들은 이데올로기와 문적 기제들을 이용하여 억압을 정당화하지만 부산행 KTX에는 노골적인 살육과 저항, 배 제와 차별이 만연하고 타자혐오와 약육강식의 논리가 가득할 뿐이다.<설국열차>가 국가 발전의 기형적 종착 단계를 보여준다면 <부산행>의 열차는 국가 이전의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은유한다. 배경만 보면 설국열차보다 오히려 부산행>의 KTX가 더 직설적이고 긴박한 위험 속에서 운행 중인 셈이다. 이렇듯 좁은 공간 안에서 좀비와 대결구도를 이루는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반면 좀비는 인간의 형상을 한 괴력의 존재들이다.(영화 속에서 좀비는 현실을 반영하는 지독한 은유이기도 하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감정이 없다. 따라서 대화나 공감이나 타협의 대상도 아니다. 피를 빨아 동족의 숫자를 늘리는 '지도체제 없는 무리다 보니 좀비에 대처 하는 방법은 방어적 폭력 아니면 도피가 전부다. 이렇게 제한적인 공간 안에서 제한적인 방 법으로 이루어지는 사람과 좀비의 대결구도는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끊임없는 희생을 요구 한다. 처음에는 제법 균형을 이루던 대결구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극소수의 생존투쟁으로 변한다. 좀비에 의해 희생되어가는 승객들은 무책임하게 방치되고 무기력한 최후를 맞는다. 그들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공간 안에서 불확실한 정보에 순응하며 단지 '생존'을 희구할 뿐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심하고 배제한다. 남을 밀어내지 않으면 나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점점 좀비를 닮아간다. 세상에 이보다 더 잔인한 은유가 있을까. 언제나 그랬듯, 비극의 시작은 탐욕이다. 펀드매니저 석우가 투자한 바이오 기업에서 실험 중 유출된 바이러스에 의해 대규모 감염사태가 벌어진다는 설정은 미군의 화학폐기물에 의해 탄생한 변종 괴물을 그린 봉준호의 〈괴물〉과 맥을 같이 한다. 바이러스나 괴물로 인한 대형 재난에 국가의 대처는 기만적이고 미온적이다. 결국 사태의 해결은 개인이나 가족 차원의 문제로 축소된다. 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적 연대도 작동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가정은 해체와 결속을 반복한다. 국가 차원의 사회안전망이 부재한 상 황에서 모든 부담을 짊어지는 사람은 누구도 아닌 가부장들이다. 환난 속에서 가정과 아이를 지켜야 하는 아버지로서의 의무감은 〈괴물〉의 강두나 <부산행>의 석우나 다르지 않다. 왜 우리의 재난 영화에는 항상 국가라는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까. 왜 국가의 부재는 항상 가부 장의 희생으로 이어지는가. 어쨌거나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좋다. IMF때도 그랬으니까.그러나 영화 <부산행>의 실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드러난다. 이 영화는 가부장들의 눈물겨운 희생과 배려가 있어 소시민들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계몽한다. 노인, 임산부, 아동, 노숙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은 하나같이 의존적이다. 그들은 항상 안전한 장소에서 구조를 기다리 거나 (건장한) 남성들에게 SOS를 보내고 개인적 감상에 휩싸여 화를 자초한다. 반면 남성 들은 독립적이고 강인한데다가 위급 상황에서 타인을 위해 희생한다. 석우나 상화 뿐 아니라 심지어 의존적이었던 노숙인조차 임산부와 아이의 생환을 위해 자기의 삶을 기꺼이 던진다. 끝까지 비열한 모습을 버리지 못했던 김상무(김의성)는 또 어떤가. 그는 죽음을 앞두고서 자신의 이기적 행태를 모두 '혼자 사는 어머니’를 위한 가장으로서의 생존투쟁이었다고 변 명한다. 영화는 이렇게 가부장의 극적 희생을 반복하여 보여줌으로서 사회보호의 책임이 남성인 가부장에게 있다는 국가주의적 판타지를 옹호하고 있다. 죽음 앞에 오열하는 김상무의 변명을 듣고 있자니 화가 치밀어 오른다. 국가가 부재하는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개인을 지키는 유일한 힘은 그저 남성의 우월한 신체 능력일 뿐이라고 말하는 영화의 화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들의 희생만이 국가의 부재를 대체할 수 있다고 웅변하고 가부장들의 숭고한 희생을 미화하면서 동시에 사회비 판적 영화라고 주장하는 건 넌센스다. 만약 우리 사회가 가부장의 '내 식구 챙기기'에 의존 해야만 존속이 가능한 구조라면 가뜩이나 개별화 파편화된 사회문제들은 더더욱 개인과 가정의 범주 안에 고립되고 심화되지 않을까. 남성의 힘에 기반한 권위주의와 국가주의는 더 공고화되지 않을까. 영화 속 소극적이고 나약한 이미지의 여성 캐릭터의 문제라기보다. 남성중심의 계몽주의적 시각이 더 큰 문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괴물〉에서는 양국 국가대표 선수로 나오는 남주(배두나)가 괴물의 아가리에 불붙인 화살을 꽂아 넣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괴물〉과 〈설국열차>에 모두 출연한 고아성은 괴물로 부터 끝까지 남동생을 지켜내는 강인한 형제애와 궤도열차에서 살아남은 인류의 미래로써의 동양여성의 저력과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산행>에 나오는 여성들은 어떤가. 남 성들의 보호와 희생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국가라는 또 다른 가부장의 품으로 생환 했을 뿐이다. 이쯤해서 영화를 만든 이들에게 묻고 싶다. 좀비의 확산을 방치하고 왜곡했던 국가는 어디로 숨었는가. 가부장들의 희생이 살린 것은 여성과 아이였을까 아니면 국가였을까. 글. 이준형 경감 ● 독서와 영화 후기는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에 불과합니다.認 알다X문화 문화로 보는 사람이야기 : 독서 에세이 “책장에서 펼친 세상” <나는, 나와 산다, 김민아> 누구나 혼자인 시대. 자신을 돌보는 혼자들'을 위하여 "완전한 자립은 경제적 독립이야" 군에서 막 제대한 아들에게 약간의 용돈을 주며 한 말치고는 너무 냉정했던걸까. 녀석은 유 럽여행을 갈 비용을 마련하겠다는 이유로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시작하더니 코로나가 비 행기 항로를 막아선 늦겨울 즈음해서야 여행의 꿈을 포기했다. 그래도 아르바이트 돈벌이는 멈추지 않았다. 정말 독립할 생각인가? 덜컥 걱정이 돼서 물어보았지만 원래 아들이라는 종류의 인간은 대답을 잘 하지 않으니까. 그저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는게 민망해진 나이가 되었을 뿐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기로 한다.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했 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언젠가 둥지를 벗어나 저 만의 세상을 가지게 될테지만 아직은 이제 막 군대를 제대했을 뿐인, 준비 안된 미성년 아닌가. 녀석의 심지를 굳게 해주기 위해 일부러 냉정한 말을 했지만 사실, 이십대 청년이 독립해 나가 혼자만의 경제생활(자립)을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모르는 바 아니다. 게다가 서울의 하늘 같은 주거비용을 생 각할 때 정말 녀석의 '자립'은 요원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독립을 한다면 어디서 살게?” 지나가는 소리로 물어봤을 뿐인데 아들의 대답은 단 호했다. “고시원도 좋아” 어느 부모가 멀쩡한 빈방을 놔두고 자식을 고시원으로 내보내고 싶겠는가. 나는 태세를 전 환해 독립생활의 어려움을 줄줄이 늘어놓다 말고 생각한다. 혹시 그건 자립(自立)이 아니라 고립(孤立) 아닐까. 1인가구가 늘었다는 뉴스를 들은지 꽤 오래된거 같다. 식당에서 혼밥이나 혼술을 하는 사람 들이 제법 눈에 뜨일 무렵, 나는 마트에서 1인용으로 포장된 두부 반모를 보고서야 1인 가구의 실체를 실감했다. '아들 딸 구별말고 둘만 낳아 잘기르자'던 산아제한의 시대를 관 통하여 늘 4인가족을 가족의 기본 단위로 생각하던 습관 때문에 혼자 사는 사람이 눈에 들어 오지 않았을 뿐이었다.나는, 나와 산다. <나 혼자 산다〉나 〈미운우리새끼〉와 같은 티비 프로그램에서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코믹 하고 발랄한 모습을 못 본건 아니지만 그들의 유쾌함과 자유로움은 경제적 풍요함이 전제된 결과일 뿐이고, 결혼을 못해(?) 궁상맞게(?) 사는 컨셉으로 시청자의 웃음을 낚는 도구일 뿐이다. 티비는 혼자 사는 현실의 삶을 판타지로 왜곡하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혼자 산다는 건 불편과 편견과 위험을 감내해야 하는 고행이다. 법적 혼인으로 구성된 가정이 모든 사회·복지 정책의 기본 단위인데 혼자 산다는 건 좀 무모하거나 어리 숙한 선택이 아닐까. 왜 그들은 혼자 사는 삶을 택했을까. 김민아의 신간 나는, 나와 산다〉는 “나와(with me) 사는”, 혹은 “나와서(out of family) 사는 사람의 내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우리 사회에서 혼자 산다는 건, 작가의 말을 빌어 설명하자면 “1인용 구명보트에 몸을 실은 채 망망대해를 떠다니는”(책 24p 인용) 삶이다. “솔직히 그다지 외롭지 않다” (115p)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그들은 커플들로 가득한 이케아 매장에서 외로움의 실체와 마주하고(22p),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죽음을 걱정하고(65p), 쉬운 여자로 오해받고(92p), 국가로부터 무임승차자로 낙인찍히고(135p),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을 전전하고(154p), 병원에 가면 보호자를 데려오라고 종용받는다(198p). 어쩌면 혼자 사는 삶이라는 건 자유로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피치 못할 현실을 맨몸뚱이 하나로 묵묵히 감내하는 상황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사는 삶의 문제가 심각 했던지 영국은 '외로움 담당 장관'(Minister for Loneliness)을 두고 국민들의 '외로움'을 사회문제로 다룬다고 한다. 경제적인 문제든, 건강상의 문제든 고립된 개인이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은 가족 아니면 잘해봐야 친구라고 생각하던 우리 입장에서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국가는 사회보장·사회복지의 증진에 노력할 의무를 진다.(헌법 제34조)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는...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헌법 제35조)책을 읽는 동안 별 의미 없이 읽었던 헌법 조항들이 어렴풋이 스쳐 갔다. 정말 국가는 인간 다운 생활을 할 국민의 권리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건 개별적 권리 주체들의 삶의 양태가 변하고 있다는 사회적 메시지다. 자립(自立)은 경제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개인들이 가족을 소단위로 한 가족주 의적, 국가주의적 굴레를 벗어나 비로소 독립한 한 사람의 '시민'으로 진화한다는 의미다. 이들이 끈끈한 연대와 탄탄한 사회안전망 안에서 자립(自立)할지 혹은 고독과 무기력과 빈곤 때문에 고립(孤立)될지는 우리 공동체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지 않을까. 글. 이준형 경감문화로 보는 사람이야기 : "예술로 만난" 비극적 경계인 이쾌대 (1913 - 1965)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11940년대2015년 여름, 잊혔던 화가의 회고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진행되었다. 거장이라 불리던 이 화가는 많은 이들에게 낯설게 다가왔고, 근현대미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는 환호의 대상이었다. 종전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소개된 화가의 이름은 이쾌대. 1913년 경북 칠곡의 부유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이쾌대는 서울 휘문보고를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화단의 유명인사가 되었고, 제자 양성을 위해 성북회화 연구소를 창립하였다. 본인이 그리고 싶은 주제를 자유롭게 그렸던 이쾌대는 해방 이후 좌 ·우익의 이데올로기 갈등 속에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다 종전이 이루어진 1953년 북한 으로 넘어가 작품활동을 했지만 1961년 이후 행적을 알 수 없게 된다. 분단시대 상징적 화가 남·북한 모두에서 금기 화가로, 한때 역사에서도 지워진 화가 이쾌대는 남과 북에서 해금된 이후 90년대 들어서야 알려지게 된다.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 신식 교육을 받은 모던보이 이자 아내를 사랑했던 로맨티스트였으며, 해부학 교재를 직접 만들 정도로 제자를 아낀 스승이던 이쾌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 만삭인 아내와 함께 피 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게 된다. 순식간에 인민군 취하에 들어간 서울에서 그는 강요에 의해 조선미술동맹에서 활동하게 되고, 국군에게 체포되어 거제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남녘땅에 가족을 두고 인민군 포로 신세가 되어 수용소에 갇힌 이쾌대는 수용소 내에서도 좌·우익의 혼돈속에서 죽음을 두려워하다 형이 있던 북한행을 선택한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으로 이념과 상관없이 선택한 북한행. 그는 어머니와 사랑하는 아내, 아이들이 있는 남쪽을 그리워하다 죽음을 피해간 곳에서 숙청된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작품을 보던 그의 제자 감창렬 화백은 “이쾌대 선생님은 근엄하지만 인격자이다. 그림에 대한 성실성, 끈기를 알려주셨기에 나의 물방울 그림이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존경과 감동을 느낀다.”라며 회고했다. 해방후 정치·사회사의 혼란한 현실 속에서 길을 헤매던 화가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사람들의 기억 속 '서양화가 이쾌대'로 남겨졌다. 파란색 두루마기 아래의 흰색 저고리와 황색 바지는 모두 전통의상이며, 작가의 민족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눌러쓴 중절모는 근대기에 도입된 서양의 복장이며 지식인 남성들이 주로 썼던 것이다. 붓으로 팔레트의 물감을 찍으려는 자세를 취한 작가는 자신이 '근대 조선인 이면서 동시에 '서양화가' 임을 뚜렷이 선언하고 있다. 배경에 조선 땅과 조선인들을 그려 서양화가인 자신이 근본으로 하는 지역적,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다.정면을 바라보는 당당한 자세와 굳게 다문 입술, 자신감 넘치는 표정은 현실에 맞서 당당히 나아가겠다는 각오를 표현한 듯 보인다.@monique-carrati / unsplash 경찰청인권센터 편집.디자인 : 문은영 학예연구사 (saddy0412@polic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