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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민생경찰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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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경찰은 '제복입은 시민'으로서, 함께하는 민주경찰·따뜻한 인권경찰·믿음직한
민생경찰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경찰의 뿌리인 임시정부 경찰의 초대 경무국장 백범 김 구 선생과, 그 뒤를 이어 나라와 국민을 위해
헌신했던 경찰들의 발자취를 발굴·계승하여 민주·인권 ·민생경찰의 정신으로 삼겠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과
경찰의 특별한 인연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찰조직
임시정부 경찰 인물 임시정부 경찰의 활약상을
보도한 독립신문 기사
백범 김구 선생과 경찰의 특별한 인연! 1919년 백범 김구 선생 초대 경무국장이 되다. 그는 대한민국 1호 민주경찰이었다. 김구 선생은 초대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
경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우리역사상 최초
민주공화제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찰,
이로써 백범 김구 선생은 우리 역사상 1호
민주경찰이 된 것이다.

1923년 임시정부 산하 치안조직인
‘의경대’를 창설하다. (의경대 창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1923년 12월 18일) 김구 선생은 1923년 내무총장 취임 후 그 해 12.17,
임시정부 산하 상해 교민단에 치안조직인 의경대를
창설한다. 의경대는 교민사회 치안유지와 일제 밀정 색출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의경대는 젊은 의열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경로가 되었다.

1932년 스스로 의경대장이 되어
독립투쟁을 이끌다. (구 선생이 의경대원 유상근(뒷줄 가운데)
의사와 함께 찍은 사진) 1925년 이승만 대통령 탄핵 이후 임시정부가 내홍을
겪으며 그 활동이 침체되자, 김구 선생은 1932년
의경대를 직접 이끌고 의열 독립투쟁을 지휘하여,
대한민국 독립투쟁의 전환점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8일 이봉창 의사, 도쿄에서 일왕에게 수류탄 투척 의거 1938년 3월 유진만・이덕주 의사, 국내로 파견하여 조선총독 암살 기도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 훙커우 공원 일왕 생일 축하 기념식장에 폭탄 투척 의거 1935년 5월 유상근・최흥식 의사, 만주 대련에서 일본 고관 폭살 기도

1947년 ‘민주경찰’지 창간 및 특호를 축하하며,
경찰에 축사와 축하 휘호를 선물하다. (특집「민주경찰」축하 휘호) 경무부 교육국에서 경찰교양지 「민주경찰」 을 창간하자 ‘자주독립과
민주경찰’ 제하의 축사를 기고하여 ¨사회혼란 극복의 노고를
치하하며 ‘애국 안민의 신경찰’이 되어달라¨고 당부하였다.

이어 국립경찰 2주년을 맞이하여 「민주경찰」 특호(’47.10월호)에
 ¨祝 民主警察 特號 刊行, 國民의 警鐘이 되소서¨라는 축하 휘호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혼란한 상황에서도 김구 선생은 축사에서
이미 ‘민주 · 인권 · 민생’ 경찰정신을 당부하였다. 민주경찰 ¨민주경찰 정신을 함양¨, 인권경찰 ¨상식 및 문화수준을 향상¨, 민생경찰 ¨애국안민의 신경찰¨
아직까지 찾아내지 못한 마지막 그 한분까지 경찰의 뿌리-임시정부 경찰! 당신들을 기억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찰조직 조직-경무국·연통제(경무사·경감)·의경대·경위대,
임시정부 경찰의 이름이었다.

내무부 임시정부 → 연통제 경무사/경감 1919년 12월 1일부터 1921년까지
내무부 임시정부 → 경무국 1919년 4월 25일 이후 1943년 3월 30일 경무과
내무부 임시정부 → 상해교민단 의경대(경무사/경감:국내잠입, 군자금 모금 및 기밀조사) 1923년 12월 16일부터 1936년까지
내무부 임시정부 → 경위대(경위대:요인경호 및 청사정비) 1941년 10월 17일 부터

임시정부 경찰은 임시정부의 법령에 의해 설치·공포된 정식
치안조직이었다.
임시정부 초기 사실상 유일한 실행 조직으로서
임시정부를 수호하고 일제의 밀정을 방지하는 임무를 통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의 심장부로서 항일투쟁을 이끌어가는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1919년 4월 25일 「대한민국임시정부장정」 공포로 임시정부 경찰조직인
경무국의 직제와 사무가 처음으로 규정되었고,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정」은 1919년 11월 5일 「대한민국임시관제」로 발전하였다. 인사-현재까지 찾아낸 임시정부 경찰은 모두 89명, 그들의 이름은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보와 직원록, 그리고 일제에서 작성한
사찰·공판 문서 속에 잠들어 있었다.

공보 제1호(1919년 9월 3일) - 임시정부 공보에
경무국원 전재순
김희준의 임명을
알리고 있다 조선소요사건 관계서류
(일본 육군성) - 임시정부 경찰의
이름은 일제 탄압의
흔적속에서도
발견되었다 예산, 보수 - 임시정부 경찰은 봉급을 받고, 활동 예산도 편성한
정규 경찰이었다.

임시정부 임시직원보조비 규정
(1920년 11년 18년) - 내무총장 80원,
경무국장 50원,
경호원 25원 (경무국장 봉급 50원은 오늘날 약 45만원에 해당한다.) 대한민국 26년도
세입·세출 예산서(1944년) - 임시정부 예산서에는
경위대 판공비 12,000원
특별비 24,000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경위대 예산 36,000원은
현재 가치로 약 3,480만원에
해당한다.)
임시정부 경찰의 활약상을 보도한
1925년 독립신문 기사

“경무국은 민활하고 용감한 활동을 계속 이어온 결과 …
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협박하던 ‘강도배’들은 그 그림자를 
구경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일본정탐 ‘하나다 나카가와’등은 자신들이 배치했던 
정탐선이 끊어져서 매우 당황하며 ……”
“그 자 한 사람이 목표가 아니고, 그 연루자를 모두 
없애버리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관련자들을 은밀 조사하기까지는 밝힐 수 없다”
“당국에서는 앞서 이 자를 불러 신문한 일도 있었으나 …
상당한 주의만 주고 불문에 부쳤더니 ……”

상해 독립신문은 1919. 8. 21. 도산 안창호 선생의 주도로 상해에서 창간되었으며,  일제의 끊임없는 탄압과 
자금사정으로 1926년 폐간되었다.  「경무국방문기」는 임시정부 경찰의 활약상을 보도한 것으로 동포사회의 치안을 
지키고, 일제밀정의 독립운동 방해공작을 차단하는 임시정부 경찰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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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경무국장, 임시정부 경찰의 기틀을 다지다

성명 김구(金九) 1876~1949

경찰이력 초대 경무국장

서훈 대한민국장

상세설명

  백범 김구는 27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어온 민족 독립운동가 이자, 해방된 조국을 위해 힘쓰다 비명에 돌아가신 우리나라 대표적 독립운동가 이다.

그의 생애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경찰로서의 주요 활약은 다음과 같다.


  1919년 3.1 만세 시위 사건에 가담한 뒤, 상해(上海)로 망명하여 안창호를 만나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청하였다.

이에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에 취임하여 상해 동포와 임시정부 요인들의 안녕을 책임지고 일제 밀정으로부터 임시정부를 수호하였다.

또한 정·사복 경호원 20명을 두어 임시정부 경찰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그는 1922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하여 재정적으로 힘든 임시정부를 이끌어 왔다.

그리고 1927년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고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또한 1928년에 이동녕·이시영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여 민족진영의 단합을 꾀하였다.


  1930년 국무령(國務領)에 재선되었으며, 1931년에는 지방경찰조직인 상해대한교민단 의경대장에 취임하여

의경대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교민 보호에 힘쓰는 한편, 1932년 1월 11일에는 의경대장으로 취임하여 의열투쟁을 이끌었다.


 
  같은 시기 그는 독립운동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였으며, 의경대장이자 한인애국단장으로서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동경 의거와, 3월 유진만·이덕주의사의 조선총독 암살 기도, 5월 유상근·최흥식의사의 만주 대련 남만주 철도총재 폭살을 계획하였으며,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의 홍구공원(虹口公園)의거를 계획, 실행에 성공하면서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 후 일제의 대대적 탄압으로 신변이 위험해지자 임정요인들과 함께 강소성(江蘇省) 가흥(嘉興)으로 피신하면서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8년간 이어진 임시정부 이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1933년 5월에는 중국 국민당 장개석(蔣介石) 총통을 만나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설립, 광복군 양성소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군사교육을 담당하였다.
1938년에는 민족주의 삼당(三黨) 통합문제를 논의하던 남목청(南木廳)에서 조선혁명당원 이운한(李雲漢)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9년말 장개석 총통의 도움으로 중경(重慶)으로 옮긴 뒤 임시정부 주석(主席)의 자리에 취임하였다.


  1940년에는 중경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으며, 5월 각 단체를 통합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좌우통합을 꾀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 임시정부의 임시약헌 개정과 더불어 국무위원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4월에는 개정된 헌법에 따라 다시 주석으로 임명되었으며,

광복군 특별훈련단을 설치하고 미국의 원조로써 본토 상륙을 위한 군사기술 훈련(oss훈련)을 적극 추진,

지휘하였으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해방 후에는 모스크바 삼상 회의(三相會議)에서 결의된 신탁통치에 대한 반탁 국민운동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1948. 2월 UN에서 남한 내 총선거가 결정되자 같은 해 4월 남북연석회를 하는 등

남북 통합을 위해 노력하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안두희(安斗熙)의 흉탄에 맞아 서거하였다.